0. 사회에서 친해진 지인들은 어쩐지 '친구'라기보다 '지인'에 가까워서, 웬만한 친구들보다 더 자주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아도 어쩐지 어른으로서의 자아를 내세워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선물같은 것도 적당히 뭉갤 수가 없는 것이다. 최소한 받은 만큼은 해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과한 건 서로 부담이고, 직장생활도 10여년인데 어떤 가오를 해치는 수준은 안 되는, 그런 아주 미묘한 선을 지켜야 하는 법. 그런 고민의 흔적을 쫌쫌따리로 기록해본다.
1. 어스윗플레이스 - Birthday Plate
가장 먼저 떠올렸던 선물은 요것. 달력 모양에 생일을 표시해주는 커스텀 접시다. 가격대도 무난하고 상품의 실용도 면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비주얼도 귀엽고 모든 것이 적정하였으나, 바로 이 '커스텀'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인기가 넘쳐 주문하고도 한 달을 기다려야 해서, 생일 선물임에도 생일자를 맞추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포기.
2. 올리베 - 니트 장갑
실은 이터널유의 장갑과 올리베의 장갑 중에서 고민을 했는데, 선물 받는 당사자가 이미 장갑이 있다는 점을 뒤늦게 떠올렸고 어느덧 날씨가 풀려 계절 시점상으로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재빨리 목록에서 삭제. 그 외에 올리베의 소품(컵, 폰케이스, 키링 등)들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아무래도 배송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어 슬며시 뒤로 가기.
3. 아이띵소 - 미니니트백
시작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봤던 글. '고용노동부에서 나눠주나 싶은 직장인 출퇴근 가방'에서 보았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깔끔해보여서 몇 번씩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역시 30대 중후반의 유부녀에게 선물하기에는 너무 장난스럽고 쓸모없을 것 같아서 눈물을 머금고 장바구니 삭제.
4. 아 모르겠다
여기 저기 이것 저것 방황하다보니 에라 모르겠다 그냥 무난하고 늘 카카오톡 선물하기 인기순위 붙박이 상위권인 이솝 핸드크림, 탬버린즈 손소독제, 논픽션 바디워시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가... 아니야 그래도 성의가 있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디깅해보기로.
5. 트라피스트 수녀원 유기농 잼 세트
수녀원 잼을 아시는지. 사실 나도 먹어본 적은 없는데, 이게 그렇게 맛있다고 하도 추천을 받아서 언제나 나의 먹킷에 잔잔하게 새겨져있는 것 중 하나다. 딸기잼, 무화과잼, 귤잼, 포도잼까지 네 종류이고 두 개를 선택해서 세트로 구매할 수 있어 가벼운 선물로는 안성맞춤이다. 여기에 말돈 소금까지 얹는다면 클래식과 힙스러움을 모두 품을 수도 있다. 다만 선물 받을 사람이 F&B계의 고인물(...)인지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조용히 패스.
6. 알레시 - 디아볼릭스 병따개
알레시 하면 원래 안나 G 와인오프너가 유명하다고 하나, 그것은 무려 10만원대. 조금 더 가격대를 타협해보고 싶어 알레시 홈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매우 귀여운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바로 디아볼릭스 병따개! 귀여운 악마? 유령?의 생김새를 하고 입 부분으로 오픈할 수 있게 만든 이것은 예쁘기도 한데 나름 쓸모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거의 구매 직전까지 갔었으나, 막상 집에서 병따개를 쓸 일이 있나 생각해보니 답이 나오지 않았다.
7. 에어슬랜드 - 캔들
이쯤되니 선물 때문에 지나치게 고뇌하는 나를 두고 또 다른 지인이 '에어슬랜드'를 추천해주었다. 알록달록 예쁜 캔들로, 일종의 '블록' 개념을 도입해서 조립 형태로 커스터마이징하는 것 같다. 인테리어 오브제로서도 딱일 것 같았는데 아니 어디서 어떻게 구매해야 하는 거지? 후기같은 것을 찾아보기도 어렵고. 끙끙대다가 포기했는데, 아니 저기 이거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려주실 분?
8. 플라스틱 아크 - 더티팟
찾다보니 선물이라면 모름지기 내 돈 주고 사긴 아깝지만 있으면 좋은 것이니 디자인 제품들이 딱이겠다 싶었다. 그렇게 알게 된 브랜드, 플라스틱 아크. 대체로 폰 케이스가 메인 제품들인가 싶었는데, 마침 더티팟이라는 화분이 눈에 띄었다. 무려 플라스틱을 재활용한다는 취지마저 아름다운 브랜드에 어찌 반하지 않으리오. 게다가 힙한 네온컬러감마저 눈에 쏙 와박혔다. 그렇게 장바구니에 넣으려던 차, 아니 화분만 덜렁 주는 것도 모양새가 너무 웃기잖아. 그렇다고 뭘 심어서 주기에도 그렇고. 결국 이것도 뒤로가기.
9. 포스터샵 - 포스터미러
요즘 힙한 카페들이나 유투브 룸투어 영상을 보다보면 종종 발견하게 되는 이것! 감각적인 디자인 포스터와 거울을 합쳐놓은 것이다. 거울이라는 실용성도 겸비하고,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적합하도록 감성 디자인이 더해지니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평소 취향이나 집들이 때 보았던 인테리어들을 떠올리며 디자인을 고르다가 문득 선물을 전달하는 과정과 상황을 떠올려보니... 거울을 이고지고 몇키로미터를 가는 것도 부담인데다가 선물 받은 사람으로서도 또 거울을 이고지고 몇키로미터를 가야하는 것. 무게도 무게인데다 깨질 걱정까지 더해지니 이건 나중에 택배로 직접 쏘는 형식으로나 가능한 선물이겠다 싶었다.
10. 방황을 거듭하다
로파서울의 북엔드, 카인더앤젠틀러의 브러쉬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먼지떨이), 사무엘 스몰즈의 멀티탭, 이첸도르프의 곰돌이컵, 영리영리의 링 같은 것들을 또 하염없이 살펴보다가 이건 가격 때문에 안 돼, 이건 배송 안 올 수도 있어, 이건 선물 받은 사람이 탐탁치 않아할거야 하며 엑스표시를 난사하던 중에...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파르베샵이.
11. 결론은, 파르베샵 - 위글 쿠션 (미니 사이즈)
최초에 파르베샵을 떠올렸던 것은 정말 쓸모없는 것 같은데 또 쓸모있는 그런 아이템 때문이었다. 바로 티슈 케이스. 그런데 선물이라기엔 좀 소소해보여서 아이템을 하나 더 얹어볼까 하던 차에 위글 쿠션이 눈에 띄었다. 최근에 갔던 병원은 굉장히 고급진 취향의 아이템들이 숨어있었는데 (예를 들어 손닦는 곳에 바이레도 핸드워시가 있다거나 입원실에 렉슨 미니 조명이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대기실 소파에 털실뭉치같은 쿠션이 있었는데 이게 굉장히 감각적으로 보였던 기억이 났다. 그때 봤던 모양과는 조금 다르지만 접을 수도 있고 펴서 바디필로우처럼 쓸 수도 있어서 더 실용성있어보였다. 사이즈는 물론 디자인별로도 가격차이가 꽤 난다는 게 쫌 치사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가격과 무게면에서도 쓸모와 힙스러움면에서도 특별히 결격사유가 느껴지지 않는 아이템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포장해야 하나. 선물의 고민은 또 다시 원점으로. 정말 끝이 없다 끝이 없어. 그렇지만 받는 분이 기뻐한다면, 고민하는 시간마저 뿌듯해지기에 앞으로도 계속 고민을 사서 하지 않을까.